위스키라 하면 스카치(Scotch) 위스키를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으신가요? 스코틀랜드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위스키 증류소가 있는 국가이기도 합니다. 이번 포스팅에선 스코틀랜드 위스키의 역사에 대해서 자세히 알아보고 여태껏 몰랐던 흥미로운 사실에 대해서도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스카치 위스키(Scotch Whisky)의 탄생과 발전

아일랜드에서 증류 기술을 가져오다.

위스키의 역사 중 아일랜드 사진

위스키를 증류하는 기술의 발단은 중국과 이집트 입니다. 향수를 만들기 위해서 증류 기술을 발견하게 되었다고 하는데요, 스카치 위스키의 역사는 로마의 수도사들이 증류 기술을 유럽 전역에 알림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추정된다고 합니다. 정확히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에 의해 증류 기술이 아일랜드로 전파되어 아이리시 위스키가 탄생, 이후 주변(아일라 섬, 주라 섬, 캠밸타운 등) 지역을 통해 스코틀랜드로 퍼진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아일랜드로 증류 기술이 수도사들로 인해 전파되었지만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위스키의 흔적이 나타난 것은 1494년 스코틀랜드 파이프 지역의 ‘존코’ 라는 수도사가 제임스 4세 왕으로부터 아쿠아 비테를 만들 8개볼의 몰트를 주문받는 문서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 아쿠아 비테(AQUA VITAE) : 라틴어로 ‘생명의 물’ 이라는 뜻, 증류를 한 액체를 의미함
아쿠아 비테를 프랑스 말로 하면 오드비(eau-de-vie)라고 하는데, 지금도 오크통에 숙성시키기 전에 증류주를 프랑스에서는 ‘오드비’라고 부릅니다. 이 말을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게일어인 ‘우스케 바하(Uisge beatha)’라고 불렀고 시간이 흐르며 ‘우스케 바하’→’우스케’→’위스키’ 가 되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 당시 수도사로 인해 전파된 증류 기술은 농부들이 가장 먼저 배워서 위스키를 생산하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가 곡물 보존 기술이 부족했던 시절, 금세 썩어버리는 잉여 곡물로 농부들은 위스키를 생산하게 됩니다. 이 역사적 기록을 통해 그 당시에도 지금과 같이 몰트(보리)로 증류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스코틀랜드 위스키 역사에 대한 유튜브 영상 보러가기

출처 : 유튜브 – 술익는집 Drinkhouse

스코틀랜드 정부의 개입

16세기,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활발하게 위스키 생산이 이루어졌습니다. 하지만 스코틀랜드 정부에서 위스키 생산에 관여하는 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바로 1505년 에든버러 ‘외과의사 길드’가 아쿠아 비테 생산의 독점권을 갖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기존에 위스키를 만들던 상인들은 매우 타격이 컸습니다.

이에 더불어 1644년, 스코틀랜드 정부가 ‘증류주’라는 항목에 처음으로 세금을 매기게 됩니다. 이 때부터 스카치 위스키의 세금과의 전쟁이 시작되게 됩니다. 세금을 피해 몰래 숨어서 술을 만드는건 기본이고 지나친 세금 때문에 폭동이 일어나기도 하고, 세관원과 밀주업자들 사이에서 쫓고 쫓기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하이랜드(Highland) 위스키의 서막

18세기, 스코틀랜드 내에서는 위스키 열풍이 불었습니다. 집집마다 위스키를 생산하였고 개인이 마실 목적으로 위스키를 증류할 경우 세금도 부가되지 않았습니다. 소작농들은 지주들에게 임대료 대신 위스키를 주기도 할 만큼 위스키 열풍이 불었습니다.

위스키의 역사적 지역 중 하이랜드(Highland)

하지만 1779년, 정부에서는 개인용 증류기의 용량 규정을 38L에서 7.5L로 대폭 축소 시켜버립니다. 뿐만 아니라, 세관에게는 이를 위반하는 증류기에 대해서 몰수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졌습니다. 이에 그치지 않고 1781년, 결국 개인이 증류하는 행위는 모두 불법이 되어버렸습니다. 이 때 부터 개인, 소규모 증류를 하던 사람들은 세관이나 정부의 감시망을 피할 수 있는 하이랜드(Highland) 골짜기로 숨어들게 됩니다.

하이랜드(Highland)의 ‘스페이사이드’ 지역은 숨어서 밀주를 만들기 딱 좋은 지형이었습니다. 협곡과 계곡이 많고 잉글랜드 본토와도 거리가 아주 멀어서 스코틀랜드 내 다른 지역보다 세관의 눈을 피해서 비교적 여유롭게 술을 만들 수 있었던 지역이었습니다. 그 결과로 품질 좋은 술이 스페이사이드 지역에서 많이 생산되었다고 합니다.

위스키의 역사적 지역 중 스페이사이드(Speyside)

당시 제조업자들은 세관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석탄 대신 이탄(Peat)을 사용하였습니다. 이탄은 스코틀랜드 어디에나 있어 쉽게 구할 수 있었고 석탄만큼 불이 잘 붙기도 하였습니다. 이 당시는 몰래 위스키를 만들었기 때문에 밀매로 처리하지 못한 재고가 생겼고 재고들은 당시 많이 소비되던 셰리 와인 오크통에 담아두었습니다. 이를 까먹고 있다가 오래 뒤에 오크통을 열어보니 기존의 위스키보단 전혀 다른 색과 풍미를 가진 술이 만들어져 있었습니다.

이탄(Peat)으로 인해 특유의 스모키한 향이 생겨났고, 셰리 와인 오크통으로 인해 황금빛 색과 풍부한 향의 위스키가 탄생하였습니다. 나라에서 규제를 한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스코틀랜드의 위스키의 품질과 기술은 매우 빠르게 발전하였습니다. 밀주가 성황하던 시절 하이랜드(Highland) 지역의 위스키 밀주는 점점 늘어만 갔고 골짜기, 계곡, 언덕 등 다양한 장소에서 밀주는 하나의 문화로 정착하였습니다.

1784년 하이랜드 북부 지방의 소비세를 낮추는 발효법이 발표됩니다. 증류기 크기를 76L로 제한, 연간 생산량 1갤런 당 1파운드의 세금이 부과되는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세금이 줄어들자 불법으로 위스키를 생산하던 증류소들이 합법적으로 운영할 수 있게 되었고 이 시대는 하이랜드 위스키 역사상 가장 큰 발전을 이룬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우랜드(Lowland) 위스키의 발전

위스키의 역사적 지역 중 로우랜드(Lowland)

1785년 스코틀랜드 정부는 하이랜드에서 생산된 위스키를 로우랜드 지역으로 수출하는 것을 제한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하이랜드 위스키의 성장세가 둔화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로우랜드의 위스키 제조업자들은 자급자족을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로우랜드에서 정해진 수요의 위스키를 만들어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로우랜드의 위스키 제조 기술이 발전하게 됩니다.

밀주 위스키의 반격, The Glenlivet

1822년 8월, 영국의 국왕 조지 4세의 스코틀랜더 에든버러 방문을 맞아 환영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조지 4세는 환영회에서 스페이사이드 지역의 밀주 글렌리벳(Glenlivet) 위스키를 마시고 한 눈에 반해버렸다고 합니다. 이후 국왕은 앞으로 자신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자리에서는 반드시 글렌리벳의 위스키를 사용해야 한다는 칙령을 내렸습니다.

위스키의 역사적 사실 중 글렌리벳

국왕의 위스키 사랑은 여기서 끝이 아니였습니다. 1823년, 위스키의 세금을 낮춰주고 제조 면허를 쉽게 받을 수 있게 법을 통과시킵니다. 이 때 글렌리벳 위스키를 만든 ‘조지스미스’는 이 기회를 쉽게 놓치지 않고 1824년 스코틀랜드 최초로 위스키 주류 제조 면허를 받게 됩니다.

시대적인 운을 타고난 위스키

위스키의 역사적 사건 중 필록세라에 관련한 사건

1880년쯤 프랑스의 포도밭에 포도 뿌리를 먹고 자라는 필록세라(Phylloxera)라는 해충이 기승을 부리게 됩니다. 이 때 프랑스의 와인 생산에 막대한 차질이 생기게 됩니다. 자연스럽게 기존에 브랜디를 소비하던 사람들이 위스키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심지어 맛도 좋은 위스키에 반해버린 프랑스 사람들은 그 때부터 위스키를 즐겨 마시기 시작합니다. 이렇게 프랑스에서도 스카치 위스키 시장이 급격하게 성장하게 됩니다.

블렌디드 스카치 위스키의 역사, 일정한 맛을 내자!

블렌디드 위스키(Blended Whisky)의 서막

그 당시 위스키의 품질은 일정하지 못했습니다. 오크통에서 숙성을 시킨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된 기술이 완성되진 못했습니다. 제품의 맛이 일정하지 않는 부분에 대해서 증류소를 운영하는 업자들은 매우 고민이 깊었습니다.

위스키의 역사적 사실 중 조니워커에 대한 사진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1830년, 위스키 역사의 한 획을 그을 기계가 발명 됩니다. 바로 연속식 증류기 입니다. 아니아스 커피(Aeneas coffey)라는 사람이 연속식 증류기의 초기 형태를 구현하였는데, 기존의 증류기는 팟스틸(Pot Still)이라 해서 술을 한 번 밖에 증류를 못시키는 형태였습니다. 하지만 술을 계속해서 넣어 증류할 수 있는 긴 형태의 연속식 증류기를 개발해내게 됩니다. 결국 기존보다 굉장히 높은 효율로 고순도의 알콜을 계속 뽑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위스키의 역사적 사실 중 시바스 리갈에 대한 사진

연속식 증류기에서 나온 술과 기존 방식으로 뽑아낸 술을 섞은게 바로 블렌디드 위스키(Blended Whisky)입니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제품의 맛이 일정하지 않았던 싱글몰트 위스키에 비해 일정한 맛과 품질을 유지하기 훨씬 수월했고, 섞는 방식에 따라 향과 맛을 다채롭게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 그 당시 매우 잘 팔렸다고 합니다.

1890년대에는 현재 유명한 조니 워커, 시바스 브라더스(시바스 리갈), 제임스 뷰캐넌 등으로 대표되는 마스터 블렌더들의 전성기였습니다.

블렌디드 위스키(Blended Whisky)의 몰락

스코틀랜드 전역에서 큰 호황을 누리던 블렌디드 위스키는 그리 오래 호황을 누리지 못하였습니다. 도덕적이지 못한 회사 운영, 싸구려 위스키를 과대 광고하는 사건 등으로 19세기 후반 호황을 누리던 로버트 패티슨과 윌터 패티슨의 블렌디드 위스키 회사가 부도를 맞이하면서 위스키 시장 전체가 흔들리게 됩니다.

패티슨의 구속과 항소 과정에서 1915년 비숙성 증류주 법안이 새로 만들어지게 됩니다. 이 엄격한 법안은 그 당시 영국의 재무부 장관이었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가 추진하였고, 이 법안은 현재까지도 유지되고 있습니다. 당시 목적과는 다르게 현재 위스키의 품질을 보증하는 법이 되었습니다. 그 때 제정한 법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이 법안으로 인해 위스키의 품질은 보증되었지만 증류소 허가세와 위스키 주세가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위스키 증류소의 불행이 시작됩니다.

1917년, 수출이 금지되었고 다음 해인 1918년에는 위스키의 세금이 두 배가 되었습니다. 1차 세계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전쟁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위스키 업자들은 막대한 세금을 징수해야만 했습니다. 1차 세계 전쟁이 종전되고 위스키 업자들은 다시 일어서려 했지만 그러지 못하였습니다. 1919년, 세금은 더욱 인상되었고 미국의 금주법이 발효되면서 위스키는 암흑 속 길을 계속하여 걷게 됩니다.

스카치 위스키, 험난한 길을 이겨내고 다시 힘차게 걷다.

1970년 미국의 오일쇼크로 인한 어마어마한 인플레이션으로 미국인들이 값 싼 보드카를 즐겨 먹으며 위스키의 불황을 최근까지 겪고 1980년대에 진입하여 드디어 한 줄기 빛을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증류자 연합(United Distillers), 페르노리카, 에드링턴 등 거대 자본들에 의해 많은 위스키 증류소들이 인수, 합병을 거치게 됩니다.

다른 술에 비해서 매우 길고 특이한 역사를 지닌 스카치 위스키(Scotch Whisky)는 현재 세계적인 주류 중 하나로 올라와 있습니다. 다사다난한 시절을 겪은 만큼 그 역사를 보존하려는 사람들은 지금도 스코틀랜드에서, 세계에서 위스키의 발전을 위해 많은 노력 중에 있습니다.

마무리

10년 전 까지만 해도 필자가 느끼기엔 ‘위스키’는 양주, ‘아버지 술장에서 몰래 꺼내 먹는 술’ 이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대중적으로 많이 노출이 되었지만 아직 까지 그런 인식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소주, 맥주도 좋지만 ‘술’을 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술의 맛’을 느끼기 위해서 음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한 사람으로써 앞으로 위스키가 더욱 대중적으로 발전 해 나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다양한 위스키 정보 더 알아보기 ※

→ 위스키 입문의 모든 것 : 위스키 종류부터 관련 용어까지 총 정리 !

→ 입문용 싱글몰트 위스키 추천 BEST5! : 꼭 먹어봐야 할 싱글몰트 위스키

→ 입문용 버번 위스키 추천 BEST3! : 진한 미국의 향기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 위스키 제조 과정, 맥아 제조부터 숙성 까지의 모든 것 알아보기 !

Similar Posts